히틀러는 열두 살 때 처음 바그너를 접했다. 린츠 실업학교에 다니던 촌뜨기 소년 히틀러는 극장 1층 입석에서 ‘로엔그린’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바그너의 마법에 빠진 히틀러는 훗날 “나는 단번에 사로잡혔다. 바이로이트의 거장을 향한 소년의 열광은 끝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히틀러는 나치스 총서기가 되자 바이에른 북부 소도시 바이로이트를 찾아가 바그너 유족들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바그너의 성지(聖地)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그너가 세운, 바그너만을 공연하는,

바그너가(家)의 오페라극장이다. 바그너는 28년이나 ‘니벨룽의 반지’를 구상·집필·작곡하면서 이 대작에 맞는 전용극장을 원했다. 바이에른 왕의 후원으로 1876년 극장이 서자 나흘 밤 18시간에 걸친 ‘…반지’가 올랐다. 북유럽 전설을 바탕으로 쓴 게르만 신화 ‘반지’는 수많은 영주국(領主國)으로 분할돼 근대적 민족개념이 싹트지 못했던 독일 민중에게 민족이라는 새 개념을 심어줬다. 반(反)기독교를 표방했던 니체의 바그너 숭배,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열광은 ‘반지’에 반(反)유대주의라는 도장을 찍기도 했다.

▶바그너의 미망인이자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에 이어 바이로이트 극장을 운영하던 아들 지그프리트가 죽자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던 영국인 아내 위니프레드가 시누이들을 제치고 극장의 실권을 쥐었다. 바이로이트는 나치의 문화선전장이자 성전(聖殿)이 됐다. 그녀와 나치는 민중을 세뇌·선동하려고 ‘반지’를 더욱 거칠고 광포하게 연출했다.

▶전후(戰後) 바이로이트 극장은 나치 동조자로 지목돼 한때 폐쇄됐다. ‘반지’를 위대한 종합무대극으로 되살려낸 것은 ‘반지’ 연출에서 나치풍(風)을 탈색시킨 바그너의 손자였다. 매년 여름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유럽 3대 음악축제에 꼽힌다. 대개 ‘반지’를 1주일에 걸쳐 격일로 공연하는 축제 티켓은 10년치 예매가 끝나 있다고 한다.

▶‘니벨룽의 반지’가 서울에 상륙한다. 골수 바그너 팬 ‘바그네리안’들이 가슴 설레하는 나흘 전작(全作) 공연, 이른바 ‘링 사이클’이다. 워낙 복잡 방대한 작품이라 ‘예습’이 필요하다며 동호인들은 공개 특강까지 열고 있다. 바그너박물관이 된 바이로이트의 저택 이름을 바그너는 ‘반프리트’라고 붙였다. ‘광기(狂氣)의 평화’라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바그너는 집 뒷숲에 묻혀 안식을 얻었지만, 그의 ‘열렬한 폭군적 음악(말러)’과 ‘광휘(光輝)와 광란을 통한 정화(淨化)’는 ‘반지’에 살아 있다.